질문
언약신학은 무엇이며, 그것은 성경적인가?
답변
갓퀘스천은 언약신학의 모든 측면에 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먼저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교리 (칼빈주의)와 관련하여서는 언약신학의 내용과 대부분 동의하지만,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관계 및 종말에 관한 부분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래의 글은 언약신학의 모든 측면을 전부 지지하는 저자가 작성한 글입니다. 우리는 언약신학을 긍정적으로 제시하는 글을 올리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판단 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관점이 계속해서 도전을 받아야, 우리의 신앙이 성경적으로 건전한지 확인하고, 성경을 더 열심히 연구하도록 동기 부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신학은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다는 의미에서의 “신학” 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틀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세대주의 신학” 또는 “세대주의”로 불리는 성경 해석의 틀과 주로 대조됩니다. 세대주의 신학은 19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 복음주의 진영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성경 해석 방법입니다. 그러나, 언약신학은 종교개혁 때부터 개신교 안에서 유지되어 온 다수의 의견이며, 개혁주의 또는 칼빈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선호하는 체계입니다.
세대주의는 (일반적으로) 성경을 일곱 개의 "세대" (세대는 하나님이 구속사 속에서 어떤 주어진 기간 동안 사람과 피조물을 다루는데 사용하신 특정한 수단으로 정의될 수 있다)가 전개되는 것으로 보는 반면, 언약신학은 성경을 언약이라는 틀을 통해 보는 것입니다. 언약신학은 두 가지의 우선적인 언약을 정의합니다: 그 둘은 행위언약 CW, covenant of works과 은혜언약 CG, covenant of grace 입니다. 때때로 구속언약 CR, covenant of redemption 이라는 세 번째 언약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이 언약들을 차례로 알아 볼 것입니다. 명심해야 할 중요한 점은 성경에 묘사된 여러 가지 언약들은 (예: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맺은 언약들, 그리고 새 언약) 모두 행위언약 또는 은혜언약이 성취되는 과정들이라는 것입니다.
언약 신학에서 상세히 설명된 다양한 언약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논리적으로 다른 두 언약을 선행하는 구속언약으로부터 시작 하겠습니다. 언약 신학에 따르면, 구속언약은 삼위 일체의 세 위격 사이에서 맺어진 언약으로서, 선택된 각 개인의 공동체를 구원과 영생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택하고 속죄하고 구원하는 것입니다. 한 유명한 목사이자 신학자는 구속언약 안에서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위한 신부를 택하였다” 라고 말했습니다. 구속언약이 성경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성경은 구원 계획의 영원한 특성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3-14, 3:11; 데살로니가후서 2:13; 디모데후서 1:9; 야고보서 2:5; 베드로전서 1:2). 더우기, 예수님은 종종 자신의 임무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3, 43, 6:38-40, 17:4-12). 택함 받은 자들의 구원은 창조를 시작하실 때부터 하나님의 의도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구속언약은 단지 이 영원한 계획을 언약의 언어로 형식을 갖춘 것 뿐입니다.
구속사의 관점에서 볼 때, 행위언약은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첫 번째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를 에덴 동산에 두시며 한 가지 간단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6-17). 우리는 이 명령에 암시된 언약적인 언어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동산에 두시고,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한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생명은 순종에 대한 보상이며, 죽음은 불순종에 대한 형벌입니다. 이것은 언약적인 언어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행위언약에서 "종주국-속국 언약"이라고 불리는 형식을 봅니다. 이러한 형태의 언약에서는, 종주 (즉, 왕이나 통치자)는 봉신 (즉, 신하)에게 언약의 조건들을 제시합니다. 종주국은 속국의 공물에 대한 대가로 복과 보호를 제공합니다. 행위언약의 경우, 하나님 (종주)은 사람이 언약의 규정 (즉,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에 순종할 경우 영생과 복을 약속하십니다 (아담은 인류의 머리로서 봉신의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옛언약에서도 비슷한 구조를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언약의 규정에 따라 이스라엘이 순종하면, 하나님은 그 보답으로 약속의 땅, 즉, 재건된 에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실 것이며, 또한 복을 베푸시고 나아가 모든 원수로부터 보호하실 것입니다. 반면, 언약을 위반하는 것에 대한 처벌은 그 땅에서 추방되는 것이었습니다 (기원전 722년 북왕국의 멸망과 기원전 586년 남왕국의 포로됨).
아담이 행위언약을 지키는데 실패하자, 하나님은 은혜언약이라는 세 번째 언약을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언약 안에서 죄인들 (행위언약에 따라 사는데 실패한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거저 제안하십니다.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을 예언함으로써, 타락 직후에 바로 은혜언약을 제시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행위언약은 조건적인 언약으로서 순종에는 복을, 불순종에는 저주를 약속한 것이지만, 은혜언약은 무조건적인 언약으로서 하나님 은혜에 근거하여 거저 주어진 언약입니다. 은혜언약은 고대 토지하사조약의 형식을 취하는데, 그런 조약에서 왕은 아무런 조건 없이 수여자에게 땅을 선물로 주곤 하였습니다. 한편, 믿음이 은혜언약의 조건이라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의 수여자들이 끝까지 신실하게 남아 있기를 권고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의미에서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은혜언약의 조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하는 믿음마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에베소서 2:8-9).
하나님이 개인들과 세우신 다양한 무조건적인 언약들을 통해 드러난 은혜언약을 성경에서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 은혜언약의 연장입니다. 다윗 언약 (다윗의 후손이 영원히 왕으로 통치할 것이라는 언약) 또한 은혜언약의 연장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율법을 쓰시고 우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시겠다는 언약으로서 은혜언약의 최종적인 표현입니다. 구약에 있는 이런 여러 가지 언약을 볼 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언약들이 다 성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다윗 혈통의 왕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새 언약 또한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심지어 구약에서조차, 구약의 모든 희생 제사와 의식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 (히브리서 8-10 장)이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예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 수훈에서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5:17).
구약에서 주의 백성들의 반복되는 죄에 대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하나님께서 보류하시는데,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언약이 작동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비록 모세 언약의 규정들 (행위언약의 적용)이 주의 명령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심판하리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 백성을 인내함으로 대하십니다. 이런 일은 보통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다” (열왕기하 13:23; 시편 105; 이사야 29:22, 41:8)는 구절을 동반합니다; 은혜언약을 성취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정의에 따르면 일방적인 언약임)이 종종 행위언약을 집행할 수 있는 그분의 권리보다도 우선시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언약신학 및 언약의 렌즈를 통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입니다. 언약신학에 대해 가끔 던져지는 질문은 은혜언약이 행위언약을 대신하거나 폐기시켰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언약이 낡아졌으니 행위언약도 낡아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8:13). 구언약, 곧 모세 언약은 행위언약을 적용한 것이지, 행위언약 자체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 행위언약은 순종에 대해서는 생명을, 불순종에 대해서는 죽음을 약속한 에덴동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행위언약이 십계명 안에서 더욱 구체화 되었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다시 순종에 대해서는 생명과 복을, 불순종에 대해서는 죽음과 형벌을 약속하셨습니다. 구언약은 단지 십계명으로 성문화된 도덕법을 넘어섭니다. 구언약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관련된 규칙들과 규정들을 포함합니다. 구언약은 또한 신권 정치 및 군주 정치 기간 동안 이스라엘 국가를 통치하는 시민법도 포함합니다.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구언약의 모형들과 예표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기 때문에, 구언약의 많은 측면들이 쓸모 없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8-10장 참조). 구약은 “모형과 그림자”를 나타내는 반면, 그리스도는 그 “실체”를 나타냅니다 (골로새서 2:17). 거듭 강조하지만, 그리스도는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5:17).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린도후서 1:20) 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도덕법으로 성문화된 행위언약을 폐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셨으며 (예레미야 11:44), 신약에서도 주의 백성들에게 여전히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16). 따라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행위언약의 규정을 성취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마지막 아담이며 언약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위언약의 요구를 완전하게 이루셨고, 그 완전한 의 때문에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에게 그분의 은혜언약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5:12-21은 언약과 관련하여 인류의 두 대표 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인류를 대표하였으나 행위언약을 지키는데 실패하였고, 이로 인하여 자신과 그의 후손을 죄와 죽음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대표로 오셔서 광야에서의 유혹으로부터 갈보리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행위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이에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22)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언약 신학은 성경의 언약들을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표현으로 봅니다. 구속사의 전체 이야기는 하나님이 맺으신 은혜언약의 발생 단계 (창세기 3:15)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그 결실을 맺을 때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언약신학은 구약을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으로, 신약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로 보기 때문에, 성경을 대할 때 대단히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약신학이 소위 “대체 신학” (즉,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한다)을 가르친다고 비난합니다. 이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비난입니다. 언약신학은 세대주의와는 달리, 이스라엘과 교회를 예리하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성했으며, 교회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됨)는 신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성합니다; 둘 다 하나님의 한 백성을 이룹니다 (에베소서 2:11-20). 교회는 이스라엘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은 교회입니다 (갈라디아서 6:16).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을 행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속합니다 (갈라디아서 3:25-29).
언약신학에 관해서는 더 많은 것들이 언급될 수 있지만, 명심해야 할 중요한 점은 언약신학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해석의 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언약신학이 성경을 해석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언약신학과 세대주의는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특정 이차적인 교리와 관련해서 서로 상반되는 결론을 낳기도 하지만, 둘 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충실합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에 의해,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며, 이에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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